영어교과는 도구교과일까 내용교과일까?

정사열의 영어 테크 라이프

영어교과는 도구교과일까 내용교과일까?

정사열 12 466 2 0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는 '교육 목적에 맞게 가르쳐야 할 내용을 계통적으로 짜 놓은 일정한 분야'를 말합니다. 국어, 과학, 수학, 사회와 같이 보편적으로 계속 존재하는 교과도 있지만 나라별, 급별, 지역별, 시기별로 부침이 있는 교과도 있습니다. 사회 변화와 요구에 따라 새로운 교과가 추가되거나 기존의 교과가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학교의 교과를 도구교과, 내용교과, 표현교과 등과 같은 교과군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도구교과는 '다른 교과를 학습하는데 기본 수단이 되는 교과'로 3Rs인 읽기, 쓰기, 셈하기와 관련된 국어와 수학을 말합니다. 내용교과는 '사실적인 지식 내용을 가르치는 교과'로 사회, 과학, 역사 등을 말합니다. 또한 표현교과는 '표현 활동을 하는 교과'로 미술이나 음악 등의 교과를 지식의 이해를 주로 하는 교과와 대비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교과와 관련하여 '통합교과'와 '범교과'라는 용어도 많이 쓰이는데요, 통합교과는 주로 초등학교 이하에서 개설되는 교과로, 상급학교에서 여러 교과로 분리된 교과 내용을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일상 생활에 맞게 여러 교과를 통합하여 구성한 경우를 말하며, 범교과는 별도의 교과가 아니고 모든 교과에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학습 요소들을 가리킬 때 주로 활용합니다.


영어과는 그러면 어떤 교과군에 속한다고 해야 할까요? '영어과는 도구교과'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요?


저학년의 국어와 수학은 다른 교과의 학습에 토대가 되는 읽기, 쓰기, 셈하기를 위주로 하고 있으므로 도구교과라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어와 수학조차도 조금만 고학년으로 가면 내용교과적 성격이 점점 뚜렷해집니다. 국어의 경우 읽기, 쓰기 외에 언어, 문학, 논리 등의 드넓은 영역들이 오히려 주가 되지요. 수학의 경우도 가감승제 외의 여러 수학적 사고와 방법들이 추가되고요. 물론 도구교과의 영역을 단순한 3Rs를 넘어 정보텍스트의 이해나 논리적사고 능력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긴 합니다만, 그것들의 범교과적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크게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어과는 도구교과'라고 하는 것은, 영어가 다른 교과 학습의 기초가 된다는 것인데요,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고 있는(EFL) 우리나라 상황에 어울리는 것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영어로 다른 교과를 공부하거나, 교과서가 영어로 쓰여 있거나, 영어로 사고하는 건 아니니까요. 영어가 없어도 얼마든지 다른 교과를 학습하며 그 깊이와 넓이를 확장할 수 있지요.

'영어과는 도구교과'라고 말하는 발언은 타당한 근거에 기반한다기보다는 영어교과의 '방향'에 초점을 두는 '주장'일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를 내용보다는 4 기능(주로 듣기, 말하기)을 위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기능을 내용과 분리합니다. 풍부하고 올바른 내용을 나누는 의사소통의 도구를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 내용과 상관없이 유창한 언어 기능만 키울 수 있으면 된다는 식이지요. 그러나 유창한 앵무새가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듯 의사소통할 내용이 없고 전략이 없으면 아무리 언어 기능을 익힌들 근본적인 소통능력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도구교과'로서 영어과의 성격은 주로 대학원 이상 진학하며 영어 원서로 자기 전공분야를 연구할 때 가장 크게 발현되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인들의 언어생활과는 거리가 멀지요. 우리아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다른 교과에 다수 포함된 외래어나 영어 용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어를 통해 국어의 구조와 의사소통 방법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 정도가 냉정한 판단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에 '내용교과'로서 영어과는 다른 교과에 없는 고유한 내용 영역이 풍성합니다. 영어의 언어 구조 및 표현 방식과 인간의 언어에 대한 이해, 영어권 문화의 이해, 영어로 표현/매개하는 타 교과 내용과 타 교과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관련 내용, 영어권 시, 소설, 희곡, 에세이 등의 이해 및 감상을 포함하지요. 상급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내용'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집니다만, 저학년에서도 '내용'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언어구조와 표현 방식 등의 영어과 고유 내용 영역을 기능과 분리할 수 없고, 그래서 최근 교육과정으로 올수록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는 언어형식이 점점 더 중시되고 있지요. 학생 입장에서도 전달하는 내용이 있어야 언어 기능을 익히고 활용할 동기가 생기고, 자신의 필요에 따른 내용을 중심으로 언어 기능을 익혀갈 수 있게 되겠지요. 말문이 막히는 것은 '기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용'이 없어서인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의 영어교과서는 '표현교과' 요소도 점점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기, 만들기, 조리하기 등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활동이 교과서의 의사소통 활동에 커다란 활력을 주고 있고, 학습한 영어를 활용하여 시, 노래, 캘리그래피, 에세이 등을 감상하거나 작품을 만드는 활동도 영어 학습에 동기를 높이고 학습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영어 '기능'이 일정 수준 이상 되어야만 표현활동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낮은 수준의 영어 기능으로도 얼마든지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표현활동을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해 영어 기능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영어 학습을 위해 표현활동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활동을 하면서 '실질적인' 영어 '사용'의 경험을 축적, 내재화해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통합교과' 활동은 영어과의 주요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관찰일기를 영어로 쓰면 과학과 영어의 통합교과적 활동이 되고, 한국 요리를 외국인에게 소개하는 조리법을 영어로 말하거나 쓰면 가정과 영어의 통합교과 활동이 될 것입니다. 창의력, 문제해결능력 등과 같은 '범교과' 요소들도 영어과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통합교과, 범교과 내용 요소들은 어쩌면 영어시간에 진행되는 모든 교수학습 과정에서 영어기능의 습득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학습 요소들일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영어 공부의 동기, 영어 공부 지속을 위한 방법과 전략과 깊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어과는 '도구교과'라는 표현은 굉장히 오래 전 교육과정에서나 본 것 같고, 최근에는 그런 표현이 없습니다.(아래 2015 영어과 교육과정의 '성격'과 '목표'를 참고) 분명 도구적 성격이 있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지만, 그보다 더 넓은 고유의 다양한 내용이 있는 내용교과적, 통합교과적 성격도 큰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영어과는 도구교과이니 기능의 습득에 치중하고, 더욱 어린 나이에 시작하고, 반복적 연습을 중시해 왔지만, 영어를 통한 실질적인 의사소통능력의 향상에 과연 도움이 되었는가는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영어를 통해, 또 영어를 학습하면서, 기능의 숙달 여부와 상관 없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드넓은 영어과의 내용을 탐구하며, 세상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교류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이런 활동들이 교육과정의 성취기준과 평가영역에도 반영되기를 희망합니다. 

 


[2015 영어과 교육과정] 중 성격과 목표 부분 발췌

 

성격


영어는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언어로서 서로 다른 언어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간의 주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따라서 글로벌 시대 및 지식 정보화 시대라는 변화에 부응하고 더 나아가 국제 사회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영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역량이 되었다.


이에 학교 영어 교육은 영어 의사소통능력을 갖추고 세계인과 소통하며, 그들의 문화를 알고 우리문화를 세계로 확장시켜 나갈 사람을 길러야 한다. 이를 위해 학습자가 영어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갖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 주도적인 영어 학습을 지속할 수 있도록 이끄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대인 관계 능력은 교육과정이 추구하고 있는 핵심역량으로 학교 영어 교육을 통해 해당 역량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EFL)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 밖 영어 사용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영어 사용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학교 영어 교육을 실현해야 한다. 따라서 학교 영어 교육에서는 학습자에게 가능한 한 영어 사용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교수?학습 방법을 계획?실천하고 다양한 멀티미디어 자료와 정보 통신 기술 (ICT) 등을 수업에서 활용하며 교수?학습 활동과 평가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학습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위에서 제시한 학교 영어 교과의 성격에 기반을 둔 영어과 핵심역량은 ‘영어 의사소통 역량’, ‘자기관리 역량’, ‘공동체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으로 보다 구체화 할 수 있다. 첫째, ‘영어 의사소통 역량’ 은 일상생활 및 다양한 상황에서 영어로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역량이며, 영어 이해 능력과 영어 표현 능력을 포함한다. 둘째, ‘자기관리 역량’ 은 영어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바탕으로 학습자가 자기 주도적으로 영어 학습을 지속할 수 있는 역량이며 영어에 대한 흥미, 영어 학습 동기, 영어 능력에 대한 자신감 유지, 학습전략, 자기 관리 및 평가를 포함한다. 셋째, ‘공동체 역량’ 은 지역?국가?세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가치와 태도를 공유하여 공동체의 삶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며 배려와 관용, 대인 관계 능력, 문화 정체성, 언어 및 문화적다양성에 대한 이해 및 포용 능력을 포함한다. 넷째, ‘지식정보처리 역량’ 은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영어로 표현된 정보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역량이며 정보 수집?분석 능력, 매체 활용능력, 정보 윤리를 포함한다.


목표


영어 교과는 학습자들의 영어 의사소통능력을 길러 주는 것을 총괄 목표로 삼으며 동시에 남을 배려하고 돕는 모범적인 시민 의식과 , 지적 역량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창의적 사고력을 배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외국 문화의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의 가치를 알고 상호적인 가치인식을 통해서 국제적 안목과 세계 시민으로서의 기본 예절, 협동심 및 소양을 기르는 것 역시 영어교과의 목표다.


이를 기반으로 영어 교과의 세부 목표는 첫째, 영어로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능력을 습득하여 기초적인 의사소통능력을 기르고 둘째, 평생교육으로서의 영어에 대한 흥미와 동기 및 자신감을 유지하도록 하고 셋째, 국제 사회 문화 이해, 다문화 이해, 국제 사회 이해 능력과 태도를 기르고 넷째, 영어정보 문해력 등을 포함하여 정보의 진위 및 가치 판단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12 Comments
김미경 07.16 16:34  
영어과목은 도구교과로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로 많이 힘들었는데, 은근 힘이 되는 글입니다.
정사열 07.17 08:30  
'영어과는 도구교과'라는 '딱지 붙이기'가 영어교사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영어교육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쪽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얼토당토 않은 전제로부터 우리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종우 07.16 17:06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도구, 내용, 표현,
영어교과에 대한 정의가
영어교사로서 정체성을 갖추는데
전제되어야 함을 새삼 느낍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정사열 07.17 08:37  
영어교육의 지평은 드넓은데 외부의 무분별한 관점에 대해 전문가인 우리 영어교사들이 너무 쉽게 받아들였던 측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 우리 영어교육의 문제점과 한계도 있다고 봅니다. 모든 영어교사가 드넓은 영어교육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자신만의 영역과 방법을 전문화하며 모범 사례를 생산하여 공유할 때 지금의 우리 영어교육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리라 생각해요. 자율성의 폭이 넓은 영어교사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이고요, 그래서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영어교육의 범위를 함부로 축소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고효완 07.17 10:01  
고맙습니다  자율성이 폭이넓은 영어교사인 우리가 코로나후 교육에 지평을 열어보토록 해야겠네요
정사열 07.17 10:16  
사실 모든 교과는 도구교과, 내용교과 이런 식으로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예전에 영어과를 도구교과로 분류한 사람들의 생각이 도대체 이해가 안됩니다. 국어와 영어를 착각한 것도 문제고, 언어교육을 지나치게 기능주의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문제고요... 최근에는 정보 텍스트의 문해력이 중요하다면서 또다시 도구교과로 규정하려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문해력은 단순히 언어 기능만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고 사회적 맥락이나 배경지식, 열린 사고 등의 문제가 더 큰 것 같은데, 그런 것을 키워주려고 하기보다 단지 언어를 기능적으로 더 익히면 된다는 발상인 것 같아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김현수 07.17 14:42  
기능이 아닌 함께 공유할 가치를 배워가는 영어교육. 제가 가고싶은 방향입니다^^
정사열 07.17 15:16  
영어를 통해 만들어 가는 따뜻한 세계 공동체, 그리고 그것을 위해 바른 정신과 바탕 지식과 전략을 함양하는 영어시간...
김현수 07.17 15:37  
쌤 오랫동안 같이 더 고민해주세요 ^^~
tapa 07.19 12:26  
음, 오랜동안 고민해온 문제입니다. '교과'가 '교육'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면, 어느 교과든 '도구와 내용과 표현'의 성격을 유기적으로(?)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성격구분, 분류가 꼭 필요할까요?  올해 처음으로 고1 쓰기수행평가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능력이 영작능력보다 우선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30년 넘는 영어교사경력에 이런 말을 한 게 처음입니다. 온라인수업을 준비하면서 항상 젤먼저 집어드는 질문은, '뭣이 중헌디?' 입니다. 답은 '교육'목적입니다. 올드하게도. ㅠㅠ
tapa 07.19 12:33  
이상합니다. 온라인수업에 매진하고 있는 지금, 역설적이게도, 전통적인 수업방식, 기존의 수업방식도 그 안에 교사와 학생의 '진정성'이 담겨 있음, 문제없겠단 생각이 자주 듭니다. 교육은 방식의 혁신보다는,  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지. 그 열림을 통해 진정들이, 혹은 진정한 내용들이  오가고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진정성' 제가 최고로 갖고 싶은 자원입니다!
정사열 07.21 13:43  
교육에서 가치를 분리해내고 기능만 효과적으로 배양하는 것이 현대적인 교육이고 교육과정인 것처럼 치부되고 있지요. 지식과 기술의 습득에서 문제해결력, 의사소통능력, 창의력 등의 역량으로 중심이 옮겨가긴 했지만 그것이 정녕 무엇을 위한 역량 개발인지는 여전히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혐오를 위해 창의성과 문제해결능력을 발휘하고, 왜곡을 위해 학습한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는 자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한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